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·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(문단 편집) ==== 전통주의적 관점(원폭 투하로 항복) ==== 일단 학자들에 따라서 원폭과 소련 참전 중 과연 어느 것이 항복에 더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만,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미국의 원폭 투하를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꼽는다. 일단 [[다이쇼 시대|다이쇼]] 이래로 제국의 절대 방위선인 북방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상황에 내지에서도 그러한 공격을 당하면 일단 국체보전'''만'''이라도 한 상태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.[* 여기서 고려할 점은 일본의 관동군은 이미 정예병이 아닌 잡병 수준이고, 일본이 진정으로 자랑하던 해군을 소탕한 것이 미국이다.] 반면에 소련은 오직 일본을 겨냥해서 내려왔고, 사실상 1주일 남기고 다급하게 내려왔다. 거기다가 일본 측도 이미 관동군이 일본군 내에서 최약체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.[* 당시 일본의 전선은 이미 10개에 육박했고, 관동군은 더 이상 예전의 관동군이 아니었다. 모든 정예관동군 사단들은 본토 방위와 남방 작전으로 빠진 상태였다. 1945년 6월달 자체 사찰에서 대본영은 이미 전체 관동군과 지나 파견군 180만 명이 미군 7개 사단보다도 약하다고 평가했다.] 이미 이전에 [[사이판 전투]]나 [[오키나와 전투|오키나와]]에서 관동군의 최정예가 궤멸되었음에도 일본은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껍데기만 남은 만주의 관동군이 무너졌다고 항복할 리 없었다. 무엇보다 원폭보다 소련의 참전이 일본의 항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서 간과하는 것이, 애초에 일본 군부가 마지막으로 소련에 희망을 건 이유가 미국의 융단 폭격과 원폭 투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. 일본이 미국과의 강화를 중재해 줄 카드로 소련을 생각했고 이 구상이 완전히 좌절된 계기는 소련의 참전이지만 그 정도로 일본을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국가는 어디까지나 미국이지 소련이 아니다. [[히로히토]]조차 항복 선언에서 미국의 원자탄을 항복을 결정한 요인으로 발언했지 소련의 [[만주]], [[사할린]] 공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.[* 소련의 일본 방면 3대 공세 중 하나인 쿠릴 공세는 무려 [[옥음방송]] 이후에야 개시되었다.] 기존 공습의 피해가 더 컸으니 일본 군부는 핵무기에 대해 충격받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절치 않다. 충격의 정도는 단순히 인명피해 수치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다.[* 인명피해 수치와 충격의 정도는 항상 정비례하지 않는다. 일례로 [[홀로코스트]]의 경우에도 인명피해 규모보다 공장식 학살이라는 전무후무한 잔혹성으로 세계인들에게 더욱 충격을 주었다. 단순 인명피해만 따질거면 2차 대전 기간 소련(2,600만)과 중국(2,200만)이 입은 피해가 홀로코스트(600만)보다 훨씬 더 컸다.] 그 이전에는 수많은 전투기들이 출격해 수 시간 동안 폭격해야 겨우 입은 피해를 핵무기는 단 1번에 일으킬 수 있었기에 충격의 정도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. 단순히 도쿄 대공습의 피해가 더 컸으니 히로시마/나가사키 원폭은 별로 충격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. 또한 자국의 본토가 공습과 원폭으로 파괴되고 본토의 천황의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 그깟 식민지인 만주에서의 공세가 일본에게 더 골칫거리였을 리 만무하다. 일본 군부에게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일본 본토였지 식민지나 괴뢰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. 원폭은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소련군은 본토에서 떨어진 만주에서의 일에 불과했다. 이러한 이유로 소련의 지분이 아예 0인 건 아닐지라도 소련이 미국보다 일본 항복에 있어서 공로가 더 크다는 주장은 절대 성립할 수 없다. 과거 [[할리우드]] 영화들을 통해 2차 대전 전체가 미국의 공로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, 최근 들어 그러한 대중적인 관점에 대한 반발과 그동안 묻혀 있던 [[독소전쟁]] 등의 재발굴로 소련의 업적이 재평가되며 미국의 역할이 평가절하 당하는 수정주의적 견해가 역덕들 사이에서 번지고 있다.[* 냉전 시대만 하더라도 소련이 서방세계의 적국이었기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미디어에서는 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을 축소하고 서부전선을 더욱 강조했다. 탈냉전 후 소련이 나치 독일과 싸우면서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다는 사실이 서구 일반인들이 알게 되면서 과거 소련의 역할 축소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련의 역할을 더욱 부각하는 여론이 우세하다.]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실제 소련이 막대한 기여를 한 유럽 전선뿐 아니라 고작 일주일 참전한 태평양 전선에까지 확대되어 일각에서는 '원자탄은 그 이전의 [[도쿄 대공습]] 등과 비슷한 일반적인 사건이었고 실제적인 항복 요인은 소련에 있다'라는 식의 주장이 만연하다는 것이다. 하지만 소련은 [[태평양 전쟁]] 내내 [[연합국]]에 비협조적으로 일관했으며, '4년간 일본을 항복시키지 못한 미국과 달리 일주일만에 소련이 일본을 항복시켰다'는 주장은 조금만 생각해도 설득력이 낮다. 일본은 미 해군의 군함인 [[미주리(전함)|미주리 호]]에서 항복 조인식을 했으며 당연히 미국의 이름이 연합국의 최상단에 올랐다. 대일 전선에서의 소련의 공로는 미국은 물론 중국, 영국, 영연방보다도 후순위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